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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다룬 사랑이야기 <룸 넥스트 도어>

by 취향의알고리즘 2025. 2. 14.

스페니쉬 로멘티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ovar 감독은 스페인 영화, 특히 로맨틱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1949년 생이니까 올해 76세다. 영화에서 다루는 존엄사를 고민하는 동년배도 많을 나이다. 그런데 알모도바르 감독은 2024년 첫 영어 장편 영화를 만들었다. 이제는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후기작으로 불리울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후기작들도 <페인 앤 글로리>(2019), <패러렐 마더스>(2021) 등이 모두 일흔 넘어서 만든 영화들이다. 놀라운 영감들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1930년 생인데 78세에 그의 최고 영화인 <그랜 토리노>(2008)를 감독했고 86세인 2016년에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을 연출했다. 현재 94세인데 작년에도 <배심원 #2>를 감독했다. 놀라운 분 참 많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스페니쉬로 영화를 제작해와서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최근 후기작 몇몇 작품이 칸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세 작품이 모두 주제가 사랑(성 Sex)과 죽음이다. 사랑의 스토리를 완성하려면 죽음이 필요하고 (러브스토리) 죽음을 완성하려고 해도 사랑이 필요하다(아모르). 이 영화도 원작을 읽고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이런 주제의 문제를 다루면서 놀라운 미쟝센의 세련됨을 보여주는 것도 놀랍다. 다음 영화도 영어로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서점에서의 마사와 잉그리드

1960년 생 동갑으로 가장 지적이고 아름다운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은 우리에게 봉준호 감독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 생이니까 올해 우리나라에 오면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65세가 된다. 외모에서도 나타나듯이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출신이다. 영국 공산당원이었으나 당이 해체되어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사회당에 당적을 두고 있다. 연기의 선에서 느껴지는 그런 느낌들이 있다. 뉴욕타임즈의 종군 기자로 암으로 죽어가는 마사의 역할을 멋지게 소화하고 있다. 지적인 느낌과 함께 오히려 남성적인 양성적인 느낌이 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먼저 마사 역으로 틸다 스윈튼을 정하고 작가 친구인 잉그리드 역에 누구로 할지 거의 동시에 서로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놀랍게도 찌찌뽕으로 '줄리안 무어'를 얘기해서 나중에 틸다 스윈튼이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에게 이메일을 보여주기도 했단다. 줄리안 무어도 지적인 분위기는 대단하다.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은 <스틸 앨리스>(2014)에서 치매로 인해 점점 인지력에 문제가 생기는 총명한 언어학 교수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아버지는 군법무관이고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인이다. 둘이 같은 피가 흐르는구나. 
이 둘의 대화 호흡은 정말 멋지다. 죽음 앞두고, 혹은 노년에, 아니 중년이라도 이렇게 멋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너무나 큰 행운이다. 실제 동갑이 이 두 배우의 호흡은 매우 인상적이다. 1980년대의 뉴욕의 밤을 보냈을 예순 중반의 지적 섹시함을 지닌 언니들 같다.  
 

마사의 뉴욕 아파트 수평 수직의 끝판왕

간결한 스토리와 지성적인 대화 라인, 명배우의 연기를 모두 뛰어넘는 강력한 미장센

알모도바르 감독의 색 사용에 대한 철학이 있다. 영화에서 색으로 감정선을 표현한다. 감독은 자신에게 색은 영화의 장르이자 긴장감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사(틸다 스윈튼)가 입는 옷들의 색감과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의 옷들이 다르다. 분홍색 눈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펼쳐지는 뉴욕 스카이라인의 석양도 아름답다. 
나무 서가가 펼쳐지는 서점에서의 대화도 강력한 미장센이다. 첫 장면이 서점 사인회로 시작하는 영화들이 꽤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떠올려보니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노틸힐> 이나 <미 비포 유>의 서점 장면들은 생각이 난다. 로맨스 영화에서 특히 서점 장면은 중요한 듯하다. 이 영화에서는 매우 따듯한 공간이고 추억을 떠올리는 공간이 서점이기도 하다. 첫 장면은 뉴욕의 유명한 리졸리 서점 사인회로 시작한다. 줄리안 무어는 왼손으로 사인한다. 이것도 왜 이리 멋있을까. 중간에도 우드스탁 근처에 있는 서점이 나오는데 거긴 어딘지 찾기 어려운데 멋져 보인다. 서로의 책을 찾아보고 읽고픈 책을 얘기하며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마사의 아파트도 멋진 인테리어다. 책상 서랍을 뒤지는데 나오는 틴 케이스조차 갖고 싶은 비주얼이다. 그 아파트의 가구들과 뉴욕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베란다, 그 베란다의 식물들, 흩어져 있는 책들, 부엌에 올려진 과일들, 주방 가구 광고스러운 인테리어다. 화려한 색들의 조합이다. 
암 병동이 병원도 흰색이 바탕이지만 창문에서 보이는 뉴욕 풍경, 특히 눈오는 석양의 핑크색 눈을 보는 병실은 몽환적이다. 리얼리즘이라고는 1도 없는 영화다. 죽음의 냄새 뿐 아니라 아픔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연극 무대같은 병원이다. 
최고의 장소는 마사가 죽기 위해 찾아가는 별장이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이 별장은 그냥 봐도 건축가의 작품이다. 안에 들어가면 소파, 의자, 책장 등이 모두 작품이다. 부엌 소품들도, 커피 마시는 컵도 노란색 에르메스다.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니 스토리는 죽을 수 밖에. 스토리가 텔링되기보다 쇼잉되는 영화다. 
가장 감정선을 색으로 표현했다고 보이는 장면이 녹색 소파에 둘이 앉아 흑백 영화를 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만 일곱색깔 무지개가 다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것은 흑백 영화이고 그 영화를 보고 컬러플한 그 둘이 울고 웃는다. 마사의 파란 양말이 독특하게 인상적이다. 티브이의 불빛이 이들을 비춤으로 더 색이 드러난다. 정말 예쁜 장면이다.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뷰파인더의 수직 수평선을 만들어서 찍는다. 주변 디자이너들이 내 사진의 수직 수평에 대한 지적이 그 동안 많았다. 알모도바르 감독과 촬영 감독의 수직 수평은 정말 철저하다. 모든 장면이 르네상스의 그림 처럼 선으로 분해가 가능하다. 분 단위 모든 장면이 그림 같다. 
이 미장센을 만든 사람들이 알모도바르 감독, 촬영감독 Edu Grau, 미술감독(Production Design), 메이크업감독 Morag Ross, 머리모양감독(Hair Designer) Manolo Garcia 이다. 드림팀이겠다. 
 

에드워드 호퍼의 <People in the Sun>(1960)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와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별장의 벽에 걸려 있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도 이 영화의 큰 주제를 이룬다. 마사가 이 그림을 보고 이거 진짜 아니야 하면서 큰 관심을 보인다.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인들, 특히 도시인들의 쓸쓸한 고독과 소외감을 다루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를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잘 쓰는 화가다. 뉴욕에서 20대부터 보낸 마사와 잉그리드는 호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걸려 있는 그림이 <People in the Sun>(1960) 이다. 선체어에서 햇빛을 즐기는 광경이다. 별장에서 마사와 잉그리드가 햇빛을 즐기는 베란다도 선베드다. 두 장면이 겹친다. 햇빛이 떨어지는 이 썬베드에서 마사는 생을 마친다. 두 배우도 태어난 1960년에 호퍼가 그린 그림이다. 알모도바르 감독도 색과 빛의 사용에 호퍼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병원에서 핑크 눈이 내리는 장면에서 처음 언급된 글이 제임스 조이스의 "The Dead"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에게 눈이 내린다' Snow is Falling Upon the Living and the Dead.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작곡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도 같은 이름을 가진 곡이다. 별장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여기서도 마사의 독백과 눈 내리는 장면들을 통해 보여진다. 
 

영화 안의 이야기들: 베니스영화제, 극중 극, 성과 사랑, 기후위기 

이 영화는 스페인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장편 영어 영화다. <룸 넥스트 도어>도 스페니쉬 제목이 있다. <La habitacion de lado>. 이 영화는 제 8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첫 장면인 리졸리서점 사인에서 젊은 여자가 같이 사는 친구에게 주겠다며 작가인 잉그리드에게 책 속표지에 'It will not happen again'이라고 써달라고 한다. 젊은 여자들의 우정과 사랑을 지켜보는 작가의 표정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그려진다. 이 영화는 좀 상투적이다. 리얼리즘의 정 반대 위치다. 
이 영화가 연극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야기 속 이야기이다. 이야기 구조도 매우 단순한데 회상 장면을 통해 극중 극 이라는 형식을 택했다. 딸이 태어나가 된 경위를 설명하며 베트남 전에 참전한 남자 친구인 딸의 아빠 이야기, 또 딸의 아빠가 결혼 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다 불타는 주택에 들어가 죽게 된 이야기, 그리고 이라크 전에 참전했을 때 만난 포토그라퍼와 수사의 사랑이야기 씬 등이 있다. 모두 매우 상투적이다. 배트남 전쟁, 들판의 불타는 주택, 이라크 전쟁과 동성애. 흡사 <포레스트 검프>와도 같다. 
감독의 주제인 성과 사랑 이야기가 진하게 나오는 장면이 이라크 전쟁 이야기이다. 이라크가 함락되기 전에 가르멜 수도원 소속의 스페니쉬 수사 두 명이 남겠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한 수사와 동행한 포토그라퍼가 진한 포옹을 나누는 것을 본 마사가 둘이 섹스했냐고 묻는다. 포토그라퍼가 그렇다고 답하면서 전쟁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섹스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이야기하며 섹스의 환희를 통해 전쟁 속 일상에 깃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나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마사가 기사로 내지 않았지만 스토리로 썼다고도 했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주제가 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둘이 공유했던 아니 순서대로 사귀었던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마사도 정열적이었다고 기억하는 이 남자를 잉그리드는 만나고 있다. 이 남자가 기후위기와 지구의 종말에 대해 강연하는 것이 하나의 메시지기도 하다. 이 남자가 마사가 죽은 후 잉그리드의 경찰 조사 등을 도와준다. 원작인 책에서는 이 남자의 주장이 꽤 중요한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별장에서 흑백 티브이를 보는 소파 장면이다. 일곱빛깔 무지개가 다 있다.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 시그리드 누네즈 Sigrid Nunez의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 소설 (What Are You Going Through, 2020) 은 영화의 큰 줄기와 모티브가 되었다. 여러 장면이 소설에서도 같이 나온다. 마지막 결말이 다르지만 소설의 결은 영화의 결과 너무나 달라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형철 평론가의 강추를 보고 바로 도서관에 빌려서 읽었다. 1951년 생인 작가가 69세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80년대를 30대에 보낸 작가 답게 미국의 모든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한 지적 역사의 한 흐름이 그려진다. 실제 작가는 수전 손택 Susan Sontag의 어시스트로 일한 적도 있다. 이 작가도 무척 섹시한 언니다. 책을 단숨에 읽게 할 만큼 맥락이 놀라운 소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장 폴 샤르트르 Jean-Paul Sartre 랄지 여러 대가의 문장들이 인용된다. 이런 인용 만으로도 지적인 만족이 높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된 것은 원제인 What are you going through? 가 시몬 베이유 Simone Weil 의 말이다. 시몬 베이유는 프랑스인이니 프랑스어로는 Quel est ton tourment? 가 된다.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 란 뜻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가 결국 공감의 문제라는 애기다.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하거나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시몬 베이유는 중국의 굶는 아이들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고 몇 일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 
신형철은 여기에 덧붙여 신학자 디히트리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의 타인을 평가할 때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존엄한 죽음, 안락사 

미국에서는 안락사가 당연히 불법이다. 마사가 잉그리드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내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입한 이 약을 너는 몰라야 하고 내가 이런 계획이 있다는 것도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자기 살해 범죄 동조로 어려움을 처할 수도 있다. 잉그리드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마사의 죽음을 준비하며 이후를 대비했지만 경찰의 심문은 어렵다. 돌아이 경찰은 계속해서 잉그리드가 몰랐을 리가 없다고 의심한다. 결국은 변호사를 부르게 된다. 
마사가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을 존엄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음악을 듣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당연히 존엄하게 살아 있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존엄하지 않은 내가 되기 전에 존엄한 나일 때 끝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바지에 실수를 하고 까닭모를 화를 내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본능만 남은 껍대기는 당연히 내가 아니다. 영화에도 평생을 진보적으로 산 교수가 치매 걸려 죽기 전에 할 수 있었는 두 마디 말이 '호모새끼'와 '껌둥이'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내가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내가 존엄할 때 그 상태를 끝낼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것이다. 
 

예술 영화를 어디서 볼 것인가? 

<룸 넥스트 도어>는 예술 영화라고 했다. 그러면 씨네큐브에서 봐야 한다. 같이 보는 분들의 분위기도 영화를 감상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씨네큐브에서는 모든 상영 영화의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 전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있는 영화관이다. 영화관도 분위기가 중요하다. 

우리 모두 ‘더 룸 넥스트 도어’가 있다

틸다 스윈튼이 한 말이다.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도, 가자도 ‘더 룸 넥스트 도어’라는 얘기다. ‘옆 방’에 존재하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멋진 누나 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