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영화를 보게된 계기
영화가 개봉했던 2007년부터 찜해 놓기는 했다. 씨네큐브에 걸렸던 영화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여러 평론가들의 평도 괜찮았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는 것을 보며 다시 봐야지 했었다. 코로나19와 넷플릭스를 지나며 이 영화를 잊고 있었다.
<타인의 삶>을 내게 다시 일깨워 준 것은 두 가지 사건에 의해서 였다. ‘이영지의 레인보우‘ 관람을 갔더니 이동휘 배우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더니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을 홍보하고 있었다. <타인의 삶>이라고 했다. 영화를 연극으로 각색했다고 했다. 그날 무대에서의 이동휘를 보고 그 매력에 빠져 연극을 보려는 심산으로 찾아봤다. 엘지아트센터에서 11월 말부터 시작한다고 되어 있었다. 예매해야지 생각하고 그 전에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하면서 찾아보니 다행히 왓챠에 있었다. 일단 킵해 두었다.
두 번째 사건을 계엄이었다. 성남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길에 계엄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후로 일주일 거의 잠을 못자고 아침부터 밤까지 뉴스를 보고 읽었다. 정신이 황폐해지고 육체도 힘들었다. 당연히 소설이나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현실이 투 머치 아스트랄 하다보니 소설이고 드라마가 머리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새벽 2시에 갑자기 <타인의 삶>이 보고 싶어졌다. 결론적으로 계엄과 뉴스를 황폐해진 정심과 육체를 정화했다.

<타인의 삶>의 배경인 베를린 장벽 붕괴
독일 통일을 이뤘던 베를린 장벽 붕괴 5년 전의 동독 상황을 다뤘다. 1984년의 일이다. 동독은 비밀경찰 슈타지에 의해 전 사회가 지배되고 있었다. 베를린은 동독 한 가운데 있지만 동서 베를린이 나뉘어서 서베를린은 서독 영토였다. 많은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동독에서는 장벽을 세워 탈주를 막았고 탈주하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비즐러(올리히 뮈헤)도 슈타지이다. 매우 유능한 슈타지이다. 날카로운 직감을 갖고 있고 심문도 잘한다. 첫 장면에서부터 서독으로 탈주한 옆 집 사람을 도운 사람을 심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죄를 지은자는 몇 번을 물어봐도 내용이 똑같고 잠을 재우지 않으면 죄가 없는 사람은 억울해서 분노하는데 반해 죄를 지은 사람은 울거나 애원한다는 뼈때리는 얘기를 한다.
사회주의적 신념 속에서 슈타지를 한다기 보다 직업인으로 최선을 다하고 정말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바로 이런 시대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런 폭압적 사회 속에서는 누구도 병들지 않을 수 없고 누구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 아프지 않은 자는 소시오패스거나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일 것이다.
타자기 전문가 장면도 놀랍다. 당시 동독의 모든 작가의 타자기가 비밀경찰에 등록되어 있어서 원고의 타이핑을 보면 누구 타자기에서 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독의 언론사에도 동독 스파이들이 있어 원고를 빼내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는 모든 등사기가 경찰에 등록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시험문제를 내는 등사기에도 넘버링이 되어 있었다. 대학교 앞에서 손에 등사 잉크가 묻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는 시대였다.
나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시작된 80년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중고시절을 모조리 전두환 치하에서 보냈다. 시내 거리에는 늘 전투경찰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고 대학생들을 경찰에 쫓기고 있었으며 역사 선생들은 아침에도 취해 있었다. 4월19일에, 5월18일에 수업에 들어와 수업을 하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 보던 선생님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을 지낸 모두에게는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이번 계엄 정국에서 이미 잊혀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폭압적인 그 시절의 공기가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이 영화를 봤다.
변화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 비즐러
비즐러는 도청 전문가이기도 하다. 크리스타가 출연하는 드라이만의 연극을 보고 비즐러는 드라이만에게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고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드라이만의 도청과 감시를 맡는다. 늘 변화없는 직장인인 비즐러에게는 연극이, 예술이 주는 삶의 균열이 있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드라이만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그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그의 브레히트 시집을 몰래 가져와 읽기도 한다. 브레히트야 말로 드라이만의 모델일 수도 있다. 드라이만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자기 자신에게 연민을 느낀다. 결국 비즐러는 드라이만 몰래 드라이만을 돕게 되고 그 일로 인해 숙청되어 편지를 뜯어서 감시하는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로부터 5년 후 베를린 장벽은 붕괴하고 비즐러의 삶은 변함없이 우체부로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그와 달리 남을 도왔고 그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
우연히 자기를 도운 비밀경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드라이만은 비즐러를 찾아가지만 결국 만나지는 않고 지나친다. 하지만 또 시간이 흘러 서점에서 드라이만의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서점에 들어가 그 책을 펼친 비즐러는 “선물할 건가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라고 답변한다. Das ist fur mich.
이 엔딩은 내가 본 여러 영화 중 최고의 엔딩이다.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온 에너지가 이 한 장면에서 폭발하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을 새벽 3시에 봤는데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었다. 사람은 아름다운 존재이고 특히 변화하는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존재이다. 이 엔딩에 대해 이동진 영화평론가도 영화가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하는지 모범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이 영화의 매력, 명언이 없어도 사람을 울컥하게 끌고 가는 연출의 힘
비즐러가 드라이만 집에 도청장치를 하고 나오는데 앞집 여자가 구멍을 엿보는 것을 발견하고 가서 얘기한다. 당신 딸이 의대를 계속 다니려면 조용히 해야 한다고 그리고 부하를 시켜 이 분에게 선물을 보내주라고 한다. 너무나 세련된 폭력이다. 나는 너를 다 알고 있으니 만일 네가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미 선물을 받게 함으로서 앞집의 드라이만을 배신하게 시키는 것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긴장하게 한다. 특히 슈타지 식당에서 신입 같은 직원이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던 호네커에 대한 농담을 하는 것을 보고 비즐러의 동기인 그루비츠 중령이 재밌다며 웃더니 갑자기 톤을 바꾸고 이름과 소속과 직책을 묻는 장면이 있다. 신입 직원이 당황하여 죄송하다고 하자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호네커에 다른 농담을 하면서 웃는다. 그걸 지켜보는 비즐러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데 그 눈동자에서는 야만에 대한 분노가 읽힌다.
비즐러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꼬마와 이야기 나누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꼬마가 비즐러를 올려다보며 아저씨 비밀경찰이죠? 하고 묻는다. 비즐러가 꼬마에게 비밀경찰이 뭔지 아냐고 묻자 아빠가 그러는데 사람들을 잡아가는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 비즐러가 이름을 묻는다. 꼬마가 누구 이름이요? 라고 물을 때 순간 비즐러는 꼬마가 들고 있는 공을 가르키며 공의 이름이 뭐니? 라고 묻는다. 꼬마는 바보같이 공이 이름이 어디있어요 라고 대답한다. 등줄기가 서늘한 장면이다.
2025년 우리에게 남긴 것들
사회주의자인 드라이만이 동독에서 그 사회에 반기를 들게 되는 계기가 동료 연출가의 자살이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아무 연극을 연출할 수 없는 연출가는 결국 자살을 택했다. 드라이만은 이에 대해 자살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 사회주의 천국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글을 서독 잡지에 몰래 싣는다.
다행히 우리는 자살 통계가 나오고 있으나 이제는 너무 무감각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세계 1위의 자살율을 가진 국민들이 그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통계에 잡히는 자살율이 의미를 주지 못하는 사회야말로 드라이만이 고발하고자 했던 사회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드라이만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성적 착취를 한 햄프 문화부장관에게 왜 자신은 감시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햄프 장관은 무슨 소리냐며 드라이만을 도청했다고 얘기한다. 그때서야 비로서 진실을 알고 드라이만은 집에 가서 도청장치를 확인하고 문서보관소로 간다. 이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다.
독일은 통일 후 동독의 많은 비밀경찰들을 처벌하지 않되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이 모든 서류를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었다. 드라이만도 자신에 관한 비밀경찰에 기록을 보게 된다. 거기서 여자친구가 자신을 배신한 것도 알게 되고 자신을 보호한 비밀경찰 비즐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그들이다 보니 80년대 안기부, 보안사, 경찰에 대한 기록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 때 고문한 자와 고문을 당한 자가 얼마전까지도 국회의원이었으니 놀라운 사회다. 우리도 이제는 이번 계엄을 어서 마무리하고 모든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외의 것들
이 영화는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비즐러 역을 맡은 울리히 뮈헤 배우는 동독 출신으로 동독 연극계에서는 유명했다. 그의 전 와이프가 실제 동독 비밀경찰의 끄나풀인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울리히 뮈헤 배우는 영화 개봉 후 1년 뒤인 2007년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드라이만의 책을 만나게 되는 베를린의 칼 마르크스 서점은 지금은 없어졌다. 칼 마르크스 서점의 본점 격인 프랑크푸르트에는 남아 있다.
영화의 원제는 Das Leben Der Anderen 이고 영어로는 The Lives of Others 이다.
Florian Henkel von Donnnersmarck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다.
